영화 소개

정복자 펠레. 노인와 아들

영보고 2022. 3. 23. 08:59

영화-정복자 펠레
영화 정복자 펠레

정복자 펠레. 노인과 아들

요즘 소확행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쓴 말이라고 하지만 사실 소확행을 즐기는 경향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얻기 힘든 큰 행복을 찾기보단 주위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찾아 삶을 즐기려는 사람도 늘어났지요. 그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인생이 뭐 있습니까. 소소한 행복이 오히려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은 세상을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다 압니다. 물론 젊을 땐 피부에 와닿지 않지만 나이가 든 사람은 느끼지요. 그나마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때보다 더 다양하게 소확행을 즐기는 것 같아 부럽기도 합니다.

인간이 소소한 행복을 즐기게 된 건 그리 오래전 이야기는 아닙니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유럽에서조차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지역이 아직 농경사회였고 도시 노동자의 삶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은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19세기 말 덴마크 농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정복자 펠레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소년 펠레와 그의 아버지 라세의 삶은 중세 시대 노예와 다를 바 없습니다. 라세의 꿈은 일요일 아침 침대에서 커피를 마시는 겁니다. 아들 펠레는 일하지 않고 하루 종일 노는 겁니다. 평범한 꿈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림에 떡입니다.

 

하기야 요즘 아이들도 하루 종일 놀 수는 없습니다. 빡세게 공부해야 하니까요. 영화 속 아이처럼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학원을 가야 합니다. 세상은 바뀌어도 인간의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소확행이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정복자 펠레는 덴마크의 거장 감독 빌 어거스트가 1987년에 만든 작품입니다. 스웨덴과 덴마크의 합작품입니다. 당시 칸등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원작은 덴마크의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자전적인 소설로 배경은 1870년대 덴마크 보른홀름 섬입니다.  영화는 4부작 중 펠레의 어린 시절 부분인 1부만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정복자 펠레라는 제목이 영화 내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작 나머지 부분까지 영화화돼야 진정 정복자 펠레가 될 텐데 아쉽게도 속편 이야기는 말만 있었지 무산되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펠레를 연기한 소년은 3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부풀려진 게 많아 믿을 건 못되지만 첫 연기임에도 주인공 역을 훌륭하게 연기해 낸 것을 보면 캐스팅이 잘 못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년의 실제 이름은 펠레 베네가르드, 영화 속 펠레와 같은 이름입니다. 당시 덴마크에서는 펠레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많았다고 합니다. 자식이 소설 속 펠레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부모가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지요. 

늙은 아버지 라세를 연기한 배우는 이미 고인이 된 막스 폰 시도우입니다. 스웨덴 출신 유명 배우입니다. 한때 센세이션을 일으킨 영화 엑소시스트에서 메린 신부로 나와서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습니다. 정복자 펠레에서 그는 무능하고 나약한 늙은 아버지 역을 안쓰럽지만 재밌게 연기합니다. 올센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어린 아들을 끌어들여 작업하는 장면이나 아들 앞에선 강한 아버지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우픈 모습 등 우리에게 솔솔한 재미를 줍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참 연기를 잘 하는 배우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의 연기를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영화의 매력 영상미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영상미입니다. 보른홀름 섬의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을 담은 영상은 마치 밀레의 명화를 보는 듯합니다. 영상 속 아름다움은 긴 상영 시간을 잊게 할 정도로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름답고 탁 트인 자연과는 대조적으로 영화 속 사람들의 삶은 갑갑하고 답답합니다. 고단하고 힘들고 열악하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불과 140여 년 전 이야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들은 학교에 보낸다는 점입니다.

 

노인과 아들
옛날이나 지금이나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나이가 많으면 일할 곳이 없는데 그때야 오직했겠습니까. 영화처럼 비록 마구간에 붙은 조그만 공간이라도 거두어 주면 감사할 뿐이지요. 가장 최악의 상황이 영화처럼 홀아비인 노인과 어린 아들입니다. 엄마가 없는 남자 둘의 생활. 그것도 늙고 힘없는 아빠와 아직 어린 아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살아가기 힘든 조합입니다. 다행히 라세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식을 무한히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그것이 펠레를 강한 인간으로 키운 원동력이 되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시작 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영화의 시작
짙은 안갯속

서서히 범선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갑판엔 일자리를 찾아 덴마크행 배를 탄 스웨덴 사람들이 빼곡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던 펠레는 자고 있던 아빠 라세 칼슨을 흔들어 깨웁니다.

펠레 : 아빠..
라세 : 다 잘 될 거야 (혼자 중얼거립니다)
펠레 : 그 얘기 다시 해줘요
라세 : 이 새로운 나라는 아주 색다르단다. 네 눈을 의심할 걸
펠레 : 왜 그런데요?
라세 : 돼지고기에 건포도를 넣고 빵에는 버터를 발라 먹는단다. 다른 곳에서도 먹긴 하지. 브랜디는... 물처럼 싸고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독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끄떡없다. 아빤 강하니까
펠레 : 애들은 종일 놀 수 있고요?
라세 : 그래
펠레 : 그 부분 또 들려주세요. 아빠
라세 : 임금이 높은 나라라서 애들은..
펠레 : 애들은 일을 안 해도 되죠? 종일 놀 수 있죠?
라세 : 그래

화면이 바뀌고 카메라는 배 난간에 기댄 펠레를 보여줍니다. 호기심 가득 찬 눈망울로 신세계를 바라보는 펠레의 얼굴을 한동안 클로즈업합니다. 

 

영화-정복자 펠레
영화 정복자 펠레

PS : 뜬금없지만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범선을 보고 당시 범선은 지금으로 치면 완행 열차고 증기선은 KTX 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증기선이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게 1838년이었다고 하니 영화 배경인 1876년이면 범선을 대체해 대중화된 시기가 아닐까 싶군요. 새삼 세상을 바꿔가는 인간 능력에 경외감이 듭니다. 저 같은 범부만 있었다면 세상은 어땠을까요? 아직 농경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소가 최대의 자산인 세상에서 살고 있겠지요. 아마 영화 속 라세 같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섬뜩해지는군요. 세상이 바뀐다는 건 축복입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렵더라도 열심히 살아갑시다. 과거보다는 지금이 확실히 나은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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