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

중경삼림, 두 개 에피소드. 겉과 속이 다른 사랑 이야기

영보고 2021. 12. 21. 07:35

 

영화-중경삼림
영화 중경삼림

중경삼림, 두 개 에피소드. 겉과 속이 다른 사랑 이야기

얼마 전 왓챠에서 왕가위 감독의 리마스터링 영화를 독점 공개해 화제가 됐습니다. 재밌는 점은 나이 어린 관객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는 겁니다. 왕가위는 그들에겐 생소하지만 이전 세대에겐 낯익은 감독입니다. 홍콩 느와르 전성시대를 지나 90년대에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홍콩 영화의 자존심을 지켜준 감독입니다.  당시 그의 스타일과 영상미는 많은 젊은이를 열광케 했습니다. 흥행과는 거리가 먼 몇몇 작품들도 작품성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2~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젊은이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걸 보면 그의 영화가 얼마나 감성적이고 세련된 영상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랑이야기

오늘은 그의 작품 중 하나 중경삼림을 소개할까 합니다. 1994년 작품입니다. 1994년은 홍콩 반환을 3년 남겨둔 해였습니다. 당시 중국 본토야 들뜬 분위기였지만 홍콩 시민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50년간 1국 2 체제를 약속했다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통치하에서도 자유와 인권 그리고 번영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떨쳐낼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이런 홍콩 시민의 불안한 심리를 담아낸 작품이 중경삼림입니다. 겉으론 사랑 이야기지만 속으론 홍콩인들의 불안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많은 영화가 그렇지만 겉과 속이 다른 엉큼한 영화입니다. 

 

두 개의 에피소드

영화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사랑 이야기입니다. 서로 상관없는 두 이야기를 이어주는 핵심 키워드는 스쳐지남입니다. 스쳐지남은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번화한 도시의 특징입니다. 영화에선 낯선 주인공끼리의 스쳐지남이 에피소드의 연결점이 됩니다. 스토리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서로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이 에피소드를 이어줍니다. 이것은 영화 타락천사까지 이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타락천사가 중경삼림에 들어갈 3번째 에피소드였기 때문입니다. 왕가위는 원래 중경삼림을 3개의 에피소드로 구상하였습니다. 촬영은 했으나 편집 때 분량이 너무 많아 에피소드 하나를 뺐다고 합니다. 빠진 에피소드에 촬영을 추가해 일 년 뒤 공개된 작품이 타락천사입니다. 그래서 느낌이 중경삼림과 비슷합니다.

 

Episode 1

영화는 중경맨션의 좁은 통로를 어지럽게 보여줍니다. 인도인 등 외지인들 사이에 코트를 입은 금발머리 여인이 보입니다. 그리고 잠시 메인타이틀. 다시 화면이 바뀌면 천둥 번개 소리와 음산한 음악이 뒤섞인 채 먹구름이 짙게 깔린 홍콩의 하늘이 보이고 하지무의 내레이션이 시작됩니다

 


매일 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지만

 

아마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언젠가는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정말 가까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내 이름은 하지무 경찰 넘버 223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친

이 순간

 

서로의 거리는 단 0.01cm였고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스쳐 지나간다는 말이 처음부터 나오죠? 이게 첫 번째 에피소드의 시작입니다.  어둡고 침침한 홍콩의 뒷골목과 인간 군상들을 핸드헬드 카메라스텝 프린팅 기법으로 촬영한 화려한 영상이 이어집니다.  화면이 너무 어지럽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만 이 에피소드를 좋아하는 관객도 상당히 많습니다. 연기는 부족하지만 이 영화로 일약 스타가 된  금성무(카네시로 다케시)가 너무 잘생겼고, 임청하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고(그녀의 은퇴 작품임), 무엇보다 영상이 스타일리시하기 때문입니다. 

 

배경은 중경맨션(Chungking Mansion), 왕가위가 다섯 살 때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침사추이에 위치한 오래된 주상복합건물입니다. 1960년대는 거부들이 살던 곳이지만 점차 슬럼화되어 영화처럼 인도인 등 외국인들이 밀집해 사는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 촬영 후 여행객이 많이 몰려 조금은 나아졌다지만 홍콩 여행 시 그곳 숙박시설은 피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 

 

Episode 2

두 번째 에피소드도 하지무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합니다. 내레이션이 끝나가면 California Dreamin 노래가 들리고 제복 차림의 경찰 663이 보입니다. 맞은편 패스트푸드점 Midnight Express에는 가게 주인의 사촌, 페이가 주문을 받고 있습니다.  첫 등장부터 페이란 캐릭터는 매력이 톡톡 튑니다. 페이 역을 연기한 왕페이가 원래 가수라서 그런지 가볍게 춤추는 모습이 여간 예쁘지 않습니다. 첫 영화 출연인데도 연기가 어색하지 않습니다. 경찰 663을 연기한 양조위도 멋집니다. 경찰 제복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습니다. 양조위는 캐주얼보다 제복이나 정장이 잘 어울리는 배우입니다. 화양연화에서도 양복 입은 모습이 멋있다 못해 남자인 저도 반해버릴 정도였습니다. 키는 크지 않지만 양복 빨이 잘 받는 배우입니다.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양복이 잘 어울리는 다니엘 크레이그(007) 못지않습니다. 

 

핸드헬드 카메라와 스텝 프린팅 

중경삼림이 특별히 주목받는 점은 무엇보다 촬영 테크닉 때문입니다. 핸드헬드 카메라(hand held camera)와 스텝 프린팅(step printing) 기법이 그것인데 사실 이 기법이 중경삼림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쓰이고 있던 촬영기법이지만 워낙 인상적인 씬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중경삼림 하면 떠오르는 기법이 되었습니다.  특히 스텝 프린팅이 주목을 많이 받았는데  몽중인 배경음악 속 경찰 663과 페이가 마주하고 있는 장면(아래 사진 참조)과 경찰  663이 페이를 기다리는 카페 씬이 그것입니다.  두 장면 모두 스텝 프린팅 기법을 사용해서 주인공과 주변의 심리적 단절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이후 수많은 패러디와 오마주를 만들어 냈습니다.

 

90년대 왕가위 영화는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습니다. 늦은 감마저 있었습니다. 80년대 초 마이클 잭슨스릴러빗잇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음악이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대전환을 맞았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음악을 뮤직비디오로 즐기게 된 젊은이들은 스토리텔링보다 감성과 느낌으로 영상을 즐기고 어릴 적부터 영상에 익숙해 있던 세대라 이해도도 높았습니다. 왕가위 영화는 그들 취향에 맞았고 결국 중경삼림은 그들을 열광하게 만들었습니다. 왕가위는 시대 흐름에 맞는 감각과 센스를 가지고 찾아왔던 것입니다.  왕가위 영화에서 스토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상이 주가 되고 스토리가 종이 되는 느낌도 있습니다. 혹자는 그래서 평가절하합니다. 설정 등이 유치하다고 비평하기도 합니다. 일견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영화가 오랜 시간 관객의 사랑을 받아 왔다는 점입니다. 여러 번에 걸쳐 재상영이 되었고 왓챠의 리마스터링 공개에서도 보여줬듯이 아직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 년에도 수천 개의 영화가 세상에 나오는 가운데 왕가위 영화처럼 두고두고 재상영되는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관객은 비평가보다 현명합니다. 보고 말고는 관객이 결정합니다. 그렇게 선택된 것이 왕가위 영화입니다. 

 

영화-중경삼림
영화 중경삼림

 

※ 중경삼림의 또 다른 이야기  

 

중경삼림, 동사서독 그리고 동성서취

중경삼림, 동사서독 그리고 동성서취 세 작품은 왕가위 감독과 관련 있는 작품입니다. 중경삼림과 동사서독은 왕가위 감독 영화고, 동성서취는 그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입니다. 이들 영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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